이제서야 이제서야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다.
이제서야 이제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.
진작에 나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케어해야 했었어야 했다.
태생이 애 셋의 가운데 아이라 그런지 평생을 남의 마음 보듬는데 집중 하며 살았다.
나에게 주어진 임무와 책임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남의 표정과 기분과 well being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.
그러다 어느 날, 나는 내 친엄마와 연락을 끊었다.
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나는 많이 아팠다.
이역만리 떨어진 외딴곳에 사는 건 나인데 나는 아직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다.
명절 때 생일 때 무슨 때때마다 맞춰 뭐래도 사서 보내며 '내가 멀리서 이렇게 너희들을 생각하고 있다.' 그렇게 알려야만 했다. 그러면서 내 생일 때는 그 흔한 카드 하나, 생일 축하는 메시지조차 오지 않았다.
한국에 방문하면 나는 기다렸던 하우스키퍼! 집 청소니 치다꺼리는 당연한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. 나는 그녀가 한 번이라도 나를 먼 길 오는 귀한 손님으로 대우해 줬으면 했다. 그러나 현실은 빨랫거리나 휙 던져주며 "빨래나 개" .
그렇게 나를 대하는 엄마한테도 애써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했던 건 내가 처음 시집와서 한국 떠나올 때 엄마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.
"아이고 이년아, 뭐 하려고 그렇게 먼 데까지 시집을 갔냐.. 매년 온다고 해도 이제 죽는 날까지 15번이나 보겠니.."
엄마의 그 말에 나는 기를 쓰고 매년 한국을 갔다. 그리고 한국에 가면 나는 그동안 딸 노릇도 못했다고 엄마 편하라고 원정 나온 몸종처럼 이리저리 집 정리하고 휴가도 아닌 그런 시간을 보내고 살았다. 휴가를 받고 18시간을 날아 1년 만에 찾아온 딸은 귀한 손님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부재중이었던 하우스키퍼였다.
용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고 어떤 적은 수도세 전기세를 내란다. 네가 있는 동안 전기와 수도를 더 쓰니 그 비용을 지불하라는 모진 어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기가 찼다.
그렇게 모지리처럼 10년동안 매년 한국을 갔다. 진짜 지독하게 갔다. 그러다 어느 해... 남편이 조심스럽게 너의 친정식구들은 내 생일을 왜 한번도 안 챙겨주냐 물었다. 나는 그 말에 너무나 동감이 되었기에 너무나 면목없고 민망했다. 그래서 그해 남편생일때는 어련히 하겠지 내버려두지 않고 사위 생일이 내일이니 문자 하나면 보내달하고 부탁했다. 그런데 절실한 딸의 요청에도 그녀는 바빠서 잊어버렸다는 변명으로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나는 남편한테도 면목없는 년이 되고 말았다.
어느 날 영양제를 제일 비싼 걸로 사서 보내라는 모친의 마지막 카톡을 받았다. 갑지가 머리에 '팍'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 없이 나는 그 길로 그녀를 차단했다. 그리고 소통을 끊었다. 그녀는 공급자인 내가 사라지니 애가 탔지만 나는 행복했다. 그런 엄마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에게는 나았다.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.
나는... 엄마가 없다. 죽었다.
내 인생 2막 - 국제결혼을 했다. 새 가족을 만났다.
결혼을 하고 시집에 오면서 나는 또 다른 희망에 설렜다.
내가 선택한 남편의 가족, 시부모님이 생겼다. 그들은 괜찮은 사람들일 줄 알았다. 결혼식 피로연때 시아버지는 우리 친정아빠에게 '딸처럼 보살피겠다' 라고 하셨다. 하하.. 지키셨나요? 어르신?
그러나 현실은 지독해. 결혼해서 살아보니 역시 미친 것들은 국경이 없구나.
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. 비록 내 친엄마와는 이런 비극이 있었지만 시부모님께는 딸처럼 잘 하고 싶었다.
그런데 이런 이런... 어쩌다가 남편 엄마도 미친 여자를 만나서 지난 14년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었다.
외국인이라 트인 사고방식? 내가 호언장담한다. 외국 시어머니들이 더하면 더하다. 내가 경험한 남편의 엄마, 이 여자는 진짜 또다른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선사했지.
얼마 전 자다가 신음 소리에 놀라 깼다.
악몽을 꿨는데 좁디좁은 엘리베이터에 나, 시부모 둘 이렇게 타게 됐는데 내가 흐흡 곤란이 오면서 숨이 안 쉬어지는 것이었다. 그래서 숨을 쉬겠다고 악 소리를 냈는데 그때 그렇게 깨어나게 된 것이다. 옆에서 같이 깬 남편이 물었다. 악몽을 꾸었냐고 묻길래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해줬다. 악몽이라고 대답했다.
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다시 결심을 했다.
내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구나.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이들도 끊어내야 되겠다.
남편에게 네 엄마는 두 번 다시 안 보겠노라고 단언했다.
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.
내가 지난 14년 동안 겪었던 외국 시모의 시집살이 - 상상초월 스펙터클 스토리다 진짜.
이렇게 글로 남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느 정신상담가가 이렇게 끄집어 내야 한다더라. 어차피 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상처인데 감추고 있으면 자꾸 그 안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. 그래서 자꾸 끄집어 내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단다. 그래서 나는 끄집어 내기로 했다.
첫 이야기는 플로로그 - Bronia 로 문을열까 한다.